부산일요화가회

ㆍ이 름	장청자
ㆍ작성일	2002-09-09 (월) 15:48

ㆍ조회: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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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단상
나의 깨끗하지 못한 파래트와 화구들을 배낭속에 가득 채운다. 내일은 가을날을 하얀 캔버스에 가득 채우러 가자. 가족들은 휴일만 되면 집을 나간다고 눈총이 대단하다. 일말의 미안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림을 그리러 가고 싶은 내 열정이 개의치 않는다.
뭇 사람들이 '왜 그림을 그리죠?' 하고 물어올 때면 나의 대답은 '그냥 좋아서요' 하고 얼버무릴 때가 많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더 미묘한 감정의 발로임을, 그림을 접해볼 수 있는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하얀 캔버스에 마음내키는 대로 채색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끼니까......

지금은 아스라한 옛날같이 느껴지는 어느 스케치날이었다. 가지산 석남사 입구에 있는 다리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지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진 山寺의 정경이 너무 좋아 슬퍼기까지 했다. 나와 화우들이 이 아름다운 만추에 넋을 잃고 있을 때, 또 어떤 무리의 사람들은 여기저기 짝을 지어 고성을 지르며, 노래하고, 소리치고, 박수치고, 그래도 모자라는지 치마까지 벗어 던져 놓고 춤을 추며, 이리 뛰고 저리 구르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진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내 곁에 앉아있던 친구가 '우린 저 따위 춤을 추진 못하겠지' 하였다. '그래요 우리는 춤을 못추는 대신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앉아 구경이나 하지요' 하고 내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묘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피식 웃었다.

유유상종의 단체인 일요화가회에 가입한지도 벌써 10년이라는 연륜이 쌓였다. 내 초라하고 작은 화실에는 어느 덧 많은 그림이 쌓여 있다. 그 그림들을 바라볼 때면 잊을 수 없는 화우들의 이름이 기억되곤 한다.
J, G, K, Y, L 등등 .....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지만, 우리 화우들처럼 實利에 집착하지 않고 순수하게 만나는 벗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림으로 만난 나의 벗들은 보석얘기는 하지 않는다. 땅 투기 같은 얘기도 없다. 그냥 바보처럼 그림얘기만 하는 멋진 친구들이다. 한 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말이면 화구를 싸들고 모든 상념은 훨훨 떨쳐버리고 야외로 나간다. 뭉게구름 아래로 산이 있고, 그 산속에 들면 산원추리꽃, 제비꽃, 산패랭이꽃이 있다. 또한 들판에 나가면 맥문동꽃, 제비꽃에 홀렸다가 돌아오는 배낭속엔 이름모를 산꽃들이 가득하다. 어떤 친구는 쑥캐는 전문가이고 또 어떤 친구는 개울가에서 들미나리 캐는 선수다. 돗나물쟁이 친구, 더 큰 손 친구는 난초도 살포시 흙채로 담아온다.

나는 25년이란 세월을 심신장애자들에게 화학적 요법으로만 치료하여 왔지만, 이제는 아름다운 색감으로 조화를 이룬 그림들을 제공하여 환자들을 정서와 안정으로 치료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의미의 전문인이 되고져 다짐해 본다.
오는 10월 21일에는 전국일요화가회 합동스케치대회가 태종대 바닷가에서 열린다. 전국일요화가회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따뜻한 情이 오고가면 그림도 마음도 한층 성숙해지리라.
친구들이여 이 가을, 태양이 있는 바닷가에서 만나자.
1990년 10월

이 글은 1990년 본회 회보(제7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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