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며칠 전 새로 옮긴 화실에 에어컨을 설치했습니다.

 이제는 뜨거운 열기와 눅눅한 습기로부터 해방입니다

 마린시티의 골든 스위트빌딩에 불이 나고 쓰나미까지 덮치자

 그 여파가 전에 있던 화실에 까지 밀어닥쳐 그만 비워주고

 달맞이길이 시작되는 미포바닷가 의 낡은 주택으로 옮겨 두어 달 넘게 조물락거려

 겨우 작업실 꼴을 갖추었으나 한 여름 밀려오는 습기와 열기로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 맥화랑에서 열린 소품 전에서 졸작 한 점 팔리는 바람에 큰 맘 먹고

 에어컨을 들여오니 천국이 따로 없네요.

  3년 전 전업작가로 첫걸음을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한 게 있습니다.

 앞으로 10년을 열심히 작업해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고

 그 이후에는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모든 사람들이 감동할 수 있는 명작을

 단 한 점이라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입니다

  이제 그 10년 중 3년이 지나갑니다.

 처음엔 종일 화실에 홀로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워했는데

 이젠 스스로 만든 자폐의 울타리를 즐길 때도 있게 되었습니다.

 편하게 그리지 왜 그렇게 힘들게 그리느냐고 지켜보든 이들의 우려가 맘 쓰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자연을 즐기며 풍광 좋은 곳에 좋은 벗들과 함께 한 폭의 캔버스에 화홍을 풀어내는 것 이상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것만으론 그림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32년 전 처음 일요화가회에 들어와 분출하는 그림에 대한 열정을

 진정시키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게 계속 추임새를 불어넣어주시던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늘 가슴속에 그 열정을 키워 갈 수 있었습니다.

  삶의 최우선순위를 그림에 두고 본격적으로 작업에 뛰어든 지 만 3년!

 애초부터 결코 성공을 장담할 수없는 길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늘 꿈꾸어오던 일이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작업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홀로 온종일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지독한 외로움에 힘들어 뛰쳐나가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넘기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느낄 때의 그 기쁨은

그러한 고통조차도 즐기게 해주는 마약 같은 중독성으로 나를 이끌어 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는 저 언덕을 넘으면 새로운 세계가 있을 거라 믿고 올라보면

어느새 높아진 시야만큼 가려져있던 새로운 고개고개가 파도처럼 켜켜이 전개될 때는

맥이 풀리기도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의 반복을 통해 어쩌다 찾아오던 창작의 즐거움에

이미 중독되어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초대전을 포함해서 3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지만

가장 큰 수확은 그림이 더 좋아졌다는 것보다

스스로가 얼마나 모자라는가를 실감한 것 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얼마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

비록 실력이 생각만큼 일취월장하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단점과 장점의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되면서

열정은 더욱 뜨겁고 더 크게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반복되는 고통과 희열이 스스로를 성장시켜준다는 것이

나를 굉장히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이젤 앞에 서니 에어컨에서 나오는 청량한 냉기가 절로 붓을 들게 합니다

이제 다시 스스로를 추스르며

새로운 마음으로 바닥에서 차근차근 나아가려고합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무모한 일이지만

비록 계란은 깨어져도 바위에 한 줌의 얼룩은 남겠지요.....

무명작가의 무모함을 항상 염려해 주시는 윤종철 선생님과

격려해 주시는 여러 회원님께 감사드리며 무더위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달맞이 50번 길 12-1 새로 옮긴 작업실에서 - 한재용 올림

   <추신> 바다를 잘 보게끔 멋진 거푸집을 선물해주신 장무창님,

           대형 선풍기를 기증해주신 김향초, 장혜숙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