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운 계절
쌀쌀한 가을바람이 여름내내 늘어져 있던 혈관을 서서히 긴장시키면
무더졌던 감각들이 하나 둘 씩 기지개를 편다.
이유없는 살떨림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훑으면서 간이 부풀어오르면
나는 어느새 최후의 로맨시스트가 되어 그리운 살내음을 찾아
정처없는 순례의 길에 발을 내딛는다.
제어할 수 없는 발길이 나를 인도한 곳은 바로 "창"화실
그곳에서 나는 보았다.
캔바스를 앞에 마주하고 진검승부를 겨루는 8인의 무사들을!
비록 조금씩 말라가는 국화 몇송이와 윤기를 잃어가는 포도 두 송이와
달랑 땡감 세 개뿐이었지만 그것을 응시하는 그들의 두 눈은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고
붓을 든 팔뚝엔 필사즉생의 결의가 넘처 흘렀다.
열정과 의지로 가득 채워진 공간은 시간이 정지한 듯
엄숙한 침묵으로 그 밀도를 더해가고 있었고
순간 나는 그 진지함에 벼락을 맞은듯 숨이 멎으면서
극저온 창고에 반입된 생선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
구름에 가려진 보름달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면
스산한 가을바람에 서걱대는 억새들이 하얗게 군무를 이루고
그 속에 우뚝선 최후의 무사!
온몸을 피로 물들인채
푸른 달빛에 번쩍이는 칼날 한 자루에
명운을 싣고,
부릅떤 두눈엔 못다한 장부의 꿈이
핏줄되어 타오른다
일도필살! 필사즉생!
..............................................................................
지극히 통속적인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엄청난 중압감과 소름끼치는 비장함으로
그 날밤 "창"화실에 현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