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요화가회

ㆍ이 름	한재용
ㆍ작성일	2002-08-16 (금)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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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정신에서 본정신으로

요즘처럼 신선한 가을바람이 소매깃 사이로 솔솔 불어오면 나는 또 다시 10대처럼 간이 부풀어 오른다. 아주 작은 일에도 신선한 감동을 느끼게 되며 스치는 가을바람속에서도 옛 연인의 향취가 더욱 짙어옴을 느낀다. 마치 신들린 무당의 육신처럼 그러한 감동의 전율이 도저히 나의 육신만으론 지탱치 못할 정도로 커질 때면 나는 드디어 맨정신에서 본정신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스케치 전날밤 시샘어린 마누라의 냉소를 뒤로 흘리며 화구를 챙기는 나의 두 팔에 출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병사의 심장을 두드리듯 맨정신에서 본정신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피가 세속의 모든 찌꺼기를 걸러 또 다른 나를 만드느라고 힘찬 맥박을 울린다.
언제나 스케치 안내문의 서두를 장식하는 '우천불구' 참으로 명쾌한 단어이다.
어떻게 본정신이 아니면 우천불구가 있을 수 있으랴! 체념어린 마누라의 시선조차 내몰라라 하고 집을 나서면 마음은 벌써 천 리 밖이다. 선풍도골의 지도교수님과 만년청년 김고문님, 막 모내기하다 참 드시러 온 듯 소탈한 회장님, 만년소녀 배날리자 여사님 그리고 여러 반갑고 아름다운 벗들과 만나면 나는 벌써 대가가 된다. 달리는 차안에서 차창으로 스쳐가는 가을풍경을 바라보노라면 세룰리안 블루의 맑은 가을 하늘이 계곡의 청류처럼 내 몸속으로 콸콸 들어와 발밑에서부터 찰랑대며 차오르기 시작한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면 발끝에서 머리끝, 손끝까지 그리고 껍데기까지 모든게 세룰리안 블루를 흠뻑 머금은 덩어리가 된다. 굳이 붓이 필요 있으랴! 따가운 가을 햇살아래 펴는 캔버스 위에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손가락을 들어 캔버스위를 한번씩 그으면 본정신으로 돌아간 내가 세룰리안 블루의 그 청아한 빛깔은 쉴새없이 쏟아낸다.
한번 터치에 하늘이 열리고 두 번 터치에 산이 달린다. 세 번 터치에 대지가 펼쳐지고 네 번 터치에 내가 그 속에 있다. 대가가 따로 있나? 또한 대가가 아닌들 어떠랴? 수준은 비록 호작질이라도 폼은 대가답게! 알맹이가 껍질보다 소중하지만 때로는 껍질이 좋아야 좋은 알맹이를 담을 수도 있으니까. 자연을 저울질하지 말자. 내가 그 속에 있고 그가 내 속에 있는데 좀스럽게 원근이 어떻고 주제가 어떻고 잔손질 말자. 못 그리면 어떻고 잘 그리면 또한 무슨 소용인가! 단지 내가 그를 느끼고 그가 나를 느끼면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랴! 욕심내지 말자. 하루의 스케치에서 한가지라도 잘 그리고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우리는 붓을 놓고 잔을 들어야 한다. 더 이상 그리면 우리의 실력보다 앞선 욕심의 추악함 밖에 드러낼 게 없다.
그 술잔 속에 자연이 있고 그림이 있고 내가 있고 너가 있다. 술 한 잔 못 마시는 이라도 좋다. 한잔을 마시더라도 백 잔을 마신 듯하고 백 잔을 마시더라도 한 잔을 마신 듯 취하는 게 주도의 근본이 아니더냐! 대지의 기운이 바로 내 몸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나는 맨땅에 주저앉아 명경같은 가을을 마신다. 푸른 가을하늘을 마신다. 사랑을 마신다. 세룰리안 블루로 가득찬 내 몸에 수정같은 소주 한 잔이 촉매가 되어 온몸이 활활 타올라 마침내 나는 본정신의 정점에 오른다. 보이는 게 다 그림이요 예술이고, 보이는 이마다 어버이요 형제요 친구요 연인이다. 그야말로 근자에 유행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처럼 '난 알아요!'고 '환상속에 그대가 있다!'이다.
감히 세상의 그 어느 모임이나 단체이던 이러한 도의 경지에 오를 수가 있으랴! 휴지 한 장, 물감 찌꺼기 하나도 챙기는 우리의 자연사랑!
남이 즐거워야 내가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며 절제하는 우리의 술사랑!
호작질하듯 하면서도 폼은 대가인 듯한 우리의 순수한 그림사랑!
스케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진국들만 느끼는 은밀한 눈짓 뒤에 가지는 뒷풀이는 정말 압권이다. 우리 모두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수퍼맨이 된다. 공맹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없다. 온 세상이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다. 속이 허하도록 계속되는 고담준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뒷풀이의 마지막 잔이 울대를 적시며 온몸에 퍼질 때면 본정신은 서서히 허물을 벗고 세속의 때가 묻은 맨정신이 스멀스멀거린다. 하지만 조금은 싱싱하게 살맛나는 내일이 다가온다.
바로 이런 맛에 나는 오늘도 본정신으로 돌아갈 일요일을 기다리며 하루를 연다.

이 글은 1992년 본회 회보(제13호)에 실린 글임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5	그날 밤 "창"화실 풍경 [1]	한재용	2002-10-09	1837

24	8인의 무사들이 현신하다!! [1]	한재용	2002-10-09	1825

23	내가 외로울 때.. [3]	지종근	2002-10-02	1791

22	주전자 뚜껑의 작은 구멍같은 사랑 [3]	한재용	2002-09-11	1806

21	가을의 단상	장청자	2002-09-09	1487

20	둥글게 살고 싶은 마음	최금종	2002-09-09	1559

19	맨정신에서 본정신으로	한재용	2002-08-16	1805

18	첫 스케치의 설레임	차행미	2002-08-09	1460

17	40년만에 그리는 그림	오민웅	2002-08-09	1631

16	생활속의 소묘	차영희	2002-08-07	1549

15	지폐위조범	이영오	2002-08-06	1704

14	그림은 왜 그려요 [2]	김광중	2002-07-18	1662

13	Re..그림은 왜 그려요 [3]	김광중	2002-07-19	1487

12	다음 날의 스케치 [1]	유경열	2002-06-12	1635

11	통나무배	최덕진	2002-06-04	1572

10	Hesse에게 띄우는 편지	김종길	2002-05-28	1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