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요화가회

ㆍ이 름	이영오
ㆍ작성일	2002-08-06 (화) 15:21

ㆍ조회: 1705

ㆍIP:

지폐위조범
그림에 아주 취미가 있었던 나에게 언제부터인가 그림이 나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친구에게 보이기 위해 장난삼아 그린 십 원짜리 지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나? 정교하게 그린 지폐를 늘 자랑스레 책갈피에 끼워 다니곤 했다. 그 날도 여전히 친구를 놀려주기 위해 십 원짜리 몇 장과 가짜를 섞어 아이들에게 세어 보게 했다. 그 때마다 아이들이 모두 속아 넘어 가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여러 장을 그려보자 하는 맘에 하얀 도화지에 열 장을 그렸다. 그것도 똑같이. 그러나 똑같을 수가 있을까? 그것은 아이들이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문제는 당시 담임선생님에게 발각되어 커다란 사건으로 번졌던 것이다. 누군가 고자질을 한 것이다. 이일로 부모님은 아들 삼형제 중에 나로 인해 처음으로 학교를 방문해야만 했다. 당시는 부모님이 학교에 가는 것은 엄두도 못내었고 돈 좀 있는 부자집 아이들의 부모만 가끔 학교에 오곤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이 발이 되도록 선생님께 비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어머니 큰일날 일이 아닙니까?" 선생님의 호통에 두 분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아들의 용서를 빌곤했다. 간신히 해결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 날 아마도 내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나를 반쯤 죽인 것으로 기억된다. 못된 놈! 도둑질보다 더 못된 짓이라며 작은 골방에 처넣고 각목으로 창살을 만들어 나를 가둬 버렸다. 저녁에 어머니께서는 밥을 감방속에 밀어 넣듯 주시며 "이놈아, 그게 무슨 짓이냐? 니가 몰라서 그렇지. 아주 큰 죄에 속한단다. 어휴, 이게 무슨 짓이고, 밥이나 많이 묵거라." 하시며 따스하게 나를 위로 해 주시던 기억이 또렸하다.
그것이 모두 초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의 물감 덕분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림은 나의 곁에서 멀어진 것 같다. 기술인은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구호아래 열심히 그것도 아주 열심히 기술연마에만 열중했다.
95년도에 부산일요화가회에 들어가면서 유화는 처음 그려보았다. 하얀 캔버스에 유화 특유의 질감을 느낄 수 있어 매혹이 되었다. 반짝거리는 붓자국, 유화 특유의 오일냄새, 그것은 정말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날이 새는 줄 모르고 집에서 열심히 그렸다. 당시 깨끗한 우리집이 금방 더러워지자 아내는 연방 짜증을 내며 내 뒤를 말끔히 정리해 주었다. 스케치 날짜를 기다리는 재미로 사회생활을 했다. 그림그리기전에는 낚시로 늘 아내를 일요일에 혼자 두었는데 아내의 권유로 일요화가회에 가입 후 일요일이면 더 바빠지는 나를 보며 한편으로는 후회하는 눈빛도 보였다. 지도선생님 이하 여러 선배님들의 그림그리는 방법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억해 두고 배운 탓인지 이제는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이게 무슨 일이고?"
또 나는 그림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96년 10월 사업확장으로 복에도 없는 중국에 왔기 때문이다. 떠나오던 날 아파트 베란다에 가득히 쌓여 있는 캔버스와 주인을 기다리듯 가득히 꽂혀 있는 붓을 바라보며 보물을 놓치는 듯한 심정으로 새벽 비행기로 중국에 왔다. 중국에 공장을 세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5개월 쯤 컨테이너속에 아내가 정성스럽게 포장하여 나의 유화도구일체를 보내왔다. 나는 여기서 나름대로 1주,3주를 정하여 나의 중국인 기사와 중국공장 근교에 스케치를 가곤한다.
"동스자앙. 쭌베이 하올러. 왕 날 취." (사장님 준비 다 되었는데 어디로 갈까요?)A
"취 료산 자우 쉬이 바." (로산 아홉 계곡으로 가자.)
"하오더 워먼 쪼우바."(좋습니다. 갑시다.)
그날 오후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서투른 솜씨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올챙이 배를 가진 중년의 부부인 듯한 중국인이 우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한참이나 그림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운전기사에게 나에 대해 물어보는 것 같았다. 운전기사가 나를 소개하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화가라나?
그 정도의 대화내용은 능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거품을 입에 물고 열변을 하는 운전기사를 나는 말리지 못했다. 말릴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하지 않은가? 올챙이배는 이번에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90% 통역이 가능한 나는 서슴지 않고 그의 질문에 답변했다. 그 중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질문이 있었다.
"짜이 한꾸워 수위 나이거 하짜 더." (한국에 어느 화가 소속인가요?)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이번엔 내가 잘 통하지 않는 실력의 중국어로 부산일요화가회를 열심히 소개했다. 다행히 올챙이배는 나의 말을 거의 알아 들었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도 한국으로 수출할 거라고 과감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다. 한국에 아주 유명한 화가 그룹이라고 당당히 설명했다. 올챙이배는 그의 아내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광동어로 몇 마디 주고 받더니 그의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주며 그는 현재 크지 않는 호텔을 경영하는 사람이며 방마다 그림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좀 추하게 생긴 올챙이배의 아내도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 10호 정도 크기의 그림을 500원에 팔지 않겠는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화점에 걸려있는 그림이 액자포함 100원 정도 하니 액자를 포함하지 않고 500원을 주겠다며 그들은 아주 선심쓰는 모양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그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나 역시 백화점에서 상화그림이 아주 싼값으로 팔기 위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본 경험이 있다.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한국에서 호당 1,000원에 팔린다고 당당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 한편이면 한국에서 약 10,000원(중국돈)에 팔린다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올챙이부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라니 뜨고 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면서 묻기를 백화점에 진열된 그림은 왜 가격이 그러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지식을 가지고 그들에게 설명했고 그들은 인정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이 자리를 하며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챙이배는 정중히 나에게 간청을 했다. 그렇다면 그 백화점의 그림을 그려 볼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영웅이 된 듯이 "하오"그들이 보는 앞에서 과감히 한 편을 그려 보였다. 그야말로 지금의 늦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히말라야산 같이 눈이 덮혀 있고 건너편에는 푸릇푸릇한 나무덤불이 있으며 고요히 흐르는 물이 있고 투명하게 비치는 물그림자며 그야말로 그들이 볼 때는 기가 막힌 그림이었다. 우리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에게 중국 특유의 담배를 권하기도 했고 어느 노부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칭찬인지 욕인지 말을 하곤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그들이 볼 때 정말 어려운 그림을 그것도 잠깐 20분 이내에 완료했으니 감탄할 수밖에?
올챙이배는 이번엔 열 편을 주문했다. 운전기사와 무엇인가 주고받더니만 열 편을 그려줄 수 있느냐고 기사는 나에게 물어왔다. 5,000원 (중국돈) 중 선금 1,000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 이를 어쩌나 이번엔 가짜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호포마을 스케치며 지도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그릴 바엔 이발소 그림이나 그리지?" 하는 말씀이 뒤통수를 탁치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나는 운전기사에게 시켜서 그 동안 그려놓은 한폭의 그림과 어제 그린 가짜 한 편을 신문지에 포장하여 선금 1,000원과 돌려 주었다. 결론은 가짜를 그릴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올챙이배에게서 심심찮게 전화가 오곤한다. 친구가 된 것이다. 올챙이배는 전화 맨 마지막엔 꼭 이렇게 말했다.
"록꾸오. 요 칭런 더화. 꾸어라이 워먼 뺑관바 면 페이 게이니먼 푸우."
(만약 애인 있으면 우리호텔에 오세요. 돈 받지 않겠습니다. )
싱거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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