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날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찾아 오는 계절이 문지방을 넘으면서 바람과 비로 자신의 등장을 거창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남아서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계절에 대해 빨리 방을 비워달라는 재촉일 수도 있겠지요.

억지로라도 그림을 보고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 아이들 그림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발소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주 편한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짐 데일리 (Jim Daly / 1940~)의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림 속의 아이들과 이야기가 됩니다. 실제로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비밀 쪽지   Secret Admire)
작은 카드를 받았는데, 겉 장에는 ‘나의 발렌타인이 되어줘’라고 써 있습니다. 더구나 하트 마크 가운데를
화살이 뚫고 지나갔군요. 사랑의 화살에 관통 당한 아이의 표정은 웃을 듯 말 듯 그리고 눈은 꿈을 꾸는
듯 합니다. 누구에겐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죠. 어렸을 때 화살이 뚫고 간 그림을
수 도 없이 그렸지만 정작 전해준 기억은 없습니다. 화살을 쏜 큐피드는 보이지 않지만 누군지 용기 있는
녀석이군요. 그런데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아마 그 녀석은 칠판에 적혀 있는 수학 문제는 못 풀었을 것
같습니다.

짐 데일리는 1940년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럼 금년에 68세가 되는군요. 어려서 서부의

여러 주로 이사를 다녔는데 이 때 기억들이 그의 그림에 여러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훗날 그가

‘나는 내가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것을 지금 하고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화가가 될 꿈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꿈을 낚다    Catch of My Dreams)

소년이 인어를 낚은 것일까요, 인어가 소년을 잡아 챈 걸까요? 어쩌면 소년은 책에서 보았던 인어를

정말로 잡을 계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의 눈 빛과 벌어진 입을 보면 그다지 놀란 얼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안보이지만 낚싯줄을 야무지게 잡고 있는 꼬마 인어의 동작이 너무 생동감

있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저도 저렇게 꿈꾸던 것들을 시간의 바다에서 건져 올려보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소년과 인어 (Boy and Mermaid)’라고도 소개가 되어 있는데 제목은 ‘꿈을 낚다’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3년간 군 복무를 하고 제대를 하는데 좀 특이하게 군대에서는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군 복무 시절에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 한 주먹 했던 모양이죠?

상상은 잘 안되죠, 권투선수와 아이들의 내밀한 세계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 말입니다.

 (만족   Contentment)

햇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있는 아이 옆에 고양이가 온 몸을 기대고 누웠습니다. 아기 고양이를 내려다

보는 아이의 동작이 조심스럽습니다. 고요하고도 따뜻한 교감이 아이와 고양이 사이에 흐르고 있습니다.

화면 전체를 흐르는 색조도 약간의 변화만 있어서 보는 눈도 편합니다. 고양이를 안 길러봐서 알 수

없지만 이 그림만 놓고 보면, 참 대단한 고양이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저런 자세가 가능한가요?

 (다 땄다    Wiped Out)

구슬치기를 하는데, 가운데 아이가 거의 독식을 하고 있습니다. 서 있는 아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입니다.

앉아서 바라보는 아이도 맥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따고 있는 아이는 아직도 신중합니다.

어렸을 때 구슬치기 하면 잘 따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호주머니에 몇 개 정도 담아 가지고 공터에

나가면 그 애들은 그 동안 딴 구슬들을 자루에 담아 가지고 나와서 늘 우리를 힘들게 했었죠.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고 있는 개는 주인의 불행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차라리 내가 할까?’

제대를 한 짐 데일리는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항공 방위산업체에 취직을 합니다. 그러나 화가의 꿈을

가지고 있던 데일리는 퇴근 후 밤 늦게 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람이 매력 있게 보일 때는 꿈을

위해 끝없이 준비할 때입니다. 물론 꿈도 꿈 나름이지만요.

 (그 녀의 첫 사랑    Her First Love)

이 것 참---- , 안겨 있는 개 입장에서는 죽을 맛입니다. 언뜻 봐서는 개나 아이나 키는 비슷해 보입니다.

빨래 줄에 걸리듯 개는 모든 것이 귀찮지만, 무거운 개를 안고 있는 소녀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입니다.

하긴 사랑한다고 늘 만지는 것이 능사는 아니죠. 예전에 아내가 저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 입학 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재학 중에

그린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짐 데일리는 회사를 그만두고 모든 시간을 그림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생업을 던질 정도로 그림의 판매 실적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순간     The Big Moment)

피에로가 가장 어린 아이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의식을 치르는 듯한 두 사람을 조금 큰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꼬마 어린이에게 피에로는 이상한 나라에서 온 거인처럼 보였겠지요.

그 거인이 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혹시 ‘ 너는 참 씩씩하구나’ 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이 말과 순간은 아이가 커 가면서 때때로 힘이 되겠지요.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었던 적이 있었을까, 혹시 꿈을 앗아버리지는 않았을까---- 성탄 때 산타 클로스를

만나게 되면 꼭 여쭤봐야겠습니다.

짐 데일리의 그림에는 감성이 녹아 있습니다.

‘ 감성은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감성적으로 그려진

그림은 관객들에게 선이나 모양 그리고 색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의 그림이 이해됩니다.

(일요일 아침   Sunday Morning)

햇볕 잘 드는 일요일 아침, 목욕통에 아이를 넣어 놓고 엄마는 독서에 빠졌습니다. 엄마가 옆에서 뭐라고

하시던 말던 아이는 신이 났습니다. 마루에 흥건하게 뿌려진 물을 보면 꽤 장난을 친 모양인데, 꼬마가

목욕통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다음 장면은 대개 짐작이 됩니다. 엄마에게 걸린 아이는 볼기를

한 대 맞고 다시 목욕통 속에 갇히겠지요. 그림을 보다가 자꾸 목욕통 디자인에 눈이 갔습니다.

사용하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참 예쁜 하트 모양의 목욕통입니다. 혹시 상표는 ‘엄마의 마음표 목욕통’ ?

(가시    The Thorn)

가시가 박힌 손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금 겁이 났는지 온 몸을 엄마에게 기댔습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봐서는 심각한 것 같은데 동생의 얼굴을 보다가 웃고 말았습니다. 동생의 얼굴은 누나보다

더 심각합니다. 나이와 안 어울리는 안타까움도 보입니다. 착한 동생이군요. 옆에 앉은 개도 초조한 것

같습니다.

‘ 꼭 찾아야 할 텐데 ---, 걱정이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관객들의 상상 속에 무언가를 남겨 놓으면 관객들은 그림 속에

빠져 들게 되고 그림 안에서 관객들은 그 것을 찾아 낼 것이다’. 짐 데일리의 말대로 저는 그림 속에서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맞춰 보는 중입니다.

(새 주민     The New Citizen)
제목을 ‘아이가 있어요’라고 할 까 하다가 그냥 옮기기로 했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새 주민이라고 한

작가의 유머를 따라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동생의 소리가, 여자 아이에게는

너무 신기합니다. 그런데 바지에 손을 넣고 있는 사내 아이의 표정은 조금 다릅니다.

동생이 태어나면 자신이 누리고 있던 막내의 특권이 사라질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나저나 약간 겸연쩍어 하는 엄마의 표정이 궁금해서 아내에게 물었더니 전혀 엉뚱한 답이 돌아 왔습니다.

‘저 모습은 아이한테 엄마 뱃속 아기가 남자니? 여자니? 하고 묻는 거야. 기억 안나?’

‘ ------ ‘

아무래도 어디 가서 내 머리 속에 있는 먼지봉투를 새 것으로 갈아 끼워야 할 모양입니다.

짐 데일리는 미켈란젤로, 워터하우스, 노만 락웰등의 작품을 처음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끝없이 대가들의 작품 속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그의 작품 속에서 표현 할 수 있도록 연구하게

하는 것은 그 충격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격이라면 저도 죽지 않을 만큼 받고 싶습니다.

 (얼음 배달부    The Ice Man)

얼음 배달 마차가 도착하자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얼음 조각을 하나씩 받았는데

왼쪽의 아이들은 야구를 하다가 조금 늦게 온 모양입니다. 시무룩한 얼굴이지만 파이프를 문 배달부가

아이들을 쳐다 보고 있으니까 배달 끝나고 아마 조금씩 나눠 주겠지요.

‘그러니까 먹을 것 줄 때는 빨리빨리 와야지 ----‘

개한테 한 소리 듣고 있습니다.

짐 데일리는 20세기 초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의 미국의 농촌 아이들을 그림에 담았는데, 오늘 날 그의

작품이 미국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오래 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야기    Bedtime Story)

잠자기 전 엄마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는 요즘 영화에서 나오는 환타지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상상력을 키우는 방법으로는 엄마의 이야기 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요즘은 컴퓨터가 대신하고 있지만요.

그나저나 아이가 이야기에 너무 몰두했습니다. 눈이 초롱초롱 합니다.

‘애가 ---- 너 빨리 안 잘거니?’ 엄마의 속마음입니다.

 (애독자    Favorite Reader)

두꺼운 표지의 책은 옆에 두고 만화에 정신을 놓고 있습니다. 역시 만화책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얼마나 몰두 하고 있는지 개가 아이의 배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는데도 신경도 안 쓰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예전 이야기이지만 황금박쥐나 요괴인간, 타이거 마스크가 저의 우상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이 나고도 숨어서 봤던 기억들 ------.

돌아보니까 황금박쥐도, 요괴인간도 그리고 타이거 마스크, 어느 것 하나 되지 못했군요.

존 데일리는 그의 말처럼 회화의 기술보다는 작품 속에 감성을 어떻게 녹여 넣을 것인가에 몰두한 작가

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에둘러 오지 않고 보는 관객의 가슴 속으로 바로 다가옵니다. 그의 작품이

카드나 달력, 인형 제품 등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강속구    Fast Ball)

구름이 많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와인드 업 한 자세가 아주 역동적입니다. 바람도 불고 있습니다.

서부 영화의 라스트 신에서 주인공이 악당을 향해 마지막 권총을 쏠 준비를 하듯 비장함마저 있습니다.

소년의 눈매는 또 어떤가요 ---. 홈런을 맞아도 좋으니까 아이들은 저렇게 모든 것에 열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인가를 꼭 해결해야겠다는 순수한 집념, 아이들에게 바치는 짐 데일리의 헌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 국내에서 존 데일리는 여러 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중에는 그 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작품상도

있으니까 대중들의 인기가 높다는 징표이겠지요. 또한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미국 전역을 돌며 워크샵을

통해 그의 회화 기법도 전수하는 중입니다. 그의 감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깊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철길 따라서   Walking the Rails)